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를린 공방전 (문단 편집) === 유럽 전선의 종결 === [[파일:Berlin42.jpg]] [youtube(FV88rtmNNEE)] 베를린에서 붉은 깃발을 걸고 있는 소련군 병사. [[파일:Berlin43.jpg]] 나치 독일이 항복했다는 신문을 보고 있는 프랑스계 캐나다 여성.[* 신문 기사 제목이 영어로 적혀 있고 The [[몬트리올|Montreal]] Daily Star라고 써져 있다.] [[파일:Berlin44.jpg]] 브란덴부르크 문의 반파된 동상에 붉은 깃발을 거는 소련군 병사. [[파일:Berlin45.jpg]] [[파일:Berlin46.jpg]] 제국의사당 앞에서의 소련군. [[파일:Berlin47.jpg]]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소련 해군 장병들을 촬영중인 미국 육군. [[파일:Berlin48.jpg]] 소련군의 감시하에 이동 중인 독일군 포로들. [[파일:agermansurrender.png]] 5월 9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빌헬름 카이텔]] OKW 사령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Original_setting_for_the_second_signing_of_the_Armastice_at_Karlshorst.jpg|width=600]] 독일의 2번째 항복이 이루어진 방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박물관에 있는 전시물. [youtube(WfTfR-RuRfY)] >'''모스크바에서 전해드립니다. 소비에트 정부의 발표를 전해드립니다. 제1 벨라루스 전선군의 사령관인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인 소련의 [[이반 코네프]] 원수의 도움을 받아 치열하게 진행된 시가전 끝에 베를린을 지키던 독일군을 모조리 궤멸시키고 전투를 종료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5월 2일, 독일의 도시이자 수도인 베를린을 완전히 점령했습니다!''' >------ >-소련 아나운서 유리 레비탄 소련군은 공식적으로 베를린을 점령했지만 아직도 골목 등 일부 지역에서 항복을 거부하는 패잔병들이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외곽 지역에선 한 명이라도 더 서방 연합군 점령지로 보내기 위해 저항하는 독일군 잔여 부대와 소련군의 전투가 지속되었다. 이후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5월 8일에는 서방 연합군에, 9일에는 소련군을 포함한 전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유럽 전선은 종결되었다. 이후 미국, 영국 등 서방 연합국은 5월 8일을, 러시아는 5월 9일을 [[승리의 날|전승 기념일로 삼고 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러시아의 5월 9일 전승 기념 행사에 미국, 서유럽 정, 관계 인사들도 초청받아 참석하고 있다.[* 심지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행사에는 가끔 미군이 초청받아 러시아군과 함께 시가 행진을 하기도 한다. 물론 2014년 이후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 악화로 미국과 서유럽 인사들이 참여하지 않는 사례가 더 많아졌다.] [[파일:Berlin50.jpg]] 전투 종료 후 히틀러 벙커 근처의 부서진 의자에 앉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오른쪽의 두 명은 소련군 장교들이다.] [[파일:Berlin51.jpg]]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모여 있는 소련군과 IS-2. [[파일:Berlin52.jpg|width=400]] 불타는 제국의사당 앞에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는 독일군 [[패잔병]]. 이 전투에서 소련군 병사 80,000여 명이 작전 기간 동안 전사했다. 그리고 이들 중 30,000여 명이 베를린 시가전에서 운명을 달리했으며, 그 외 280,000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중에서도 시가전인 만큼 기갑 전력의 피해가 특히 커서[* 당시 국민돌격대와 독일군 병사들은 [[존버|건물 잔해 뒤에 숨어 있다가]] 기습적으로 [[판처파우스트]]를 발사하는 전략을 썼는데, 여기에 당한 소련군 전차가 엄청나게 많았다.] 전투 기간 동안 약 2,000대[* 정확히는 오데르-나이세 공세부터 베를린 시가지 소탕 작전 완결까지의 총 전차 손실이 1,997대, 항공기 손실이 997대이다.]에 달하는 전차가 파괴되었다.[* 일견 이해가 안될 수도 있는데 독일군이 아무리 상태가 안 좋았어도 독일군은 독일군이었고, 전투의 형태가 소모가 극심하다는 시가전인 데다가 베를린은 독일의 수도이니만큼 절대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독일군은 방어자의 입장에서 되는 대로 온갖 준비를 하고 전투를 했다.] 한편 베를린에서는 소련군이 전투원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군인들은 물론 민간인의 피해도 심각해 450,000명이 죽거나 다쳤다. 물론 민간인을 놔주지 않은 독일군의 문제가 더 크지만. [[파일:Berlin53.jpg]] 피난을 가다가 소련군에게 접수된 독일 민간인들. || [youtube(VNCiHGcJzFg)] || || 함락 직후 베를린의 모습. 승리를 축하하는 소련 해군 장병들과 폐허의 모습이 보인다. || || [youtube(CG-jspYRkco)] || || 전투 이후 뒤따라 베를린에 입성한 영국군의 소식을 알리는 영상. 전투 막바지에 '''[[203mm B-4]] 곡사포'''와 다양한 야포의 직사 사격으로 토벌전을 펼치는 소련군, 소련의 포고문을 읽고 잔해를 치우는 베를린 시민들, 히틀러가 화장된 구덩이를 살펴보는 연합군 장병들, 폐허 위에서 히틀러[* 칫솔 수염과 기름 바른 머리까지 재현했다.]와 그 추종자들을 따라하며 노는[[영국/문화#s-5|(...)]] 영국군 장병들[* 소련군도 웃겼는지 같이 웃고 있다.] 및 자국 관할 구역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영국군의 모습이 보인다. || 나치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항복했으나 동부전선에 잔존한 독일군은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서부전선에 있었던 독일군은 대체로 베를린 전투의 전후로 며칠 안 있어 전부 항복했지만 우크라이나 방면군을 비롯한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항복 후에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가기 싫었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5월 11일까지 계속 전투를 벌였다. 이 외에도 독일군이 점령한 채 고립돼서 남은 지역인 미수복 지구의 독일군이 한동안 더 버텼다. 대표적으로 덴마크의 [[보른홀름]] 섬에 주둔한 12,000명의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항복할 수 없다며 영국군 장교를 데려오라고 우기다가 소련군이 섬에 대대적으로 폭격을 가하고 상륙까지 하자 그제서야 항복했다. 서부 전선에서의 공식적인 마지막 교전은 5월 20일까지 지속된 [[텍셀 봉기]]였다. 공식적인 최후의 독일군은 무려 서부전선 종결 119일 후, 일본마저 항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인 1945년 9월 4일에 항복한 비에르뇌위아 섬([[노르웨이]]의 [[무인도]])의 주둔군이었다. 이들은 기상 관측소를 설치하러 갔다가 본국과 연락이 두절되자 4개월 동안 [[바다표범]]을 사냥하며 버텼으며, 노르웨이 낚시배 선장에게 ~~구조~~발견되어 항복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